조선의 마지막 황제 고종이 가장 아끼던 공간인 건청궁은
단순한 궁궐 내의 작은 한옥이 아니라 근대 조선의 희망과 비극이 공존했던 장소였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궁 안의 궁’… 건청궁은 어떤 의미였을까?
건청궁은 고종이 자신의 사비로 지은 개인 공간이었습니다.
왕의 공식 처소인 강녕전이나 왕비의 교태전과는 달리,
고종과 명성황후가 함께 거처했던 공간입니다.
이곳에서 한국 최초의 전등이 밝혀졌고,
서양 기술이 처음으로 실험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1895년, 명성황후가 암살당한 을미사변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고종이 선택한 ‘나만의 공간’
경복궁 복원 이후에도 왕이 머물 공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고종은 경복궁 북쪽의 연못 ‘향원정’ 뒤에 사비를 들여 건청궁을 조성했습니다.
이 지역에는 왕실 도서관 지복재, 협길당, 향원정 정원이 함께 구성되어,
궁궐 내에서 유일하게 근대적 기능이 결합된 복합 공간이 탄생했습니다.
서양 문물이 실험된 공간, 건청궁
건청궁 앞 향원정 연못에서는 선교사 부인들이 피겨 스케이팅을 시연하기도 했고,
1887년, 한국 역사상 최초의 전등이 이곳에서 켜졌습니다.
이를 위해 향원정 남쪽에 발전소까지 세워졌습니다.
전깃불이 바꾼 밤 풍경과 통금의 해제
전등이 설치된 이후 조선은 전통적인 야간 통금 제도까지 폐지하게 됩니다.
이는 물리적으로 밤이 밝아졌다는 변화뿐만 아니라,
서양 문물을 적극 수용한 고종의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전깃불 뒤에 감춰진 비극, 맥케이 사건
전깃불 설치를 맡고 있던 미국 기술자 맥케이가
조선인 조수가 실수로 쏜 권총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조선 정부는 처음에는 사형을 명령했으나,
미국 공사관과 유가족의 탄원에 따라 석방되면서 외교적 논란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전등 설치 사업은 1년간 중단됩니다.
1895년, 을미사변의 현장
건청궁은 단지 혁신의 공간만은 아니었습니다.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건청궁 인근의 권역합에서 시해당한 장소입니다.
이 사건은 조선 백성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파괴와 복원의 역사
을미사변 이후, 건청궁은 1909년 일본에 의해 조기에 철거되며 역사 속에 잊혔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향원정 다리의 원위치 복원과 함께 건청궁도 복원되며,
근대 조선의 숨겨진 이야기와 역사적 의미를 품은 장소로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건청궁을 기억하는 방법
최근에는 경복궁 ‘별빛야행’ 프로그램을 통해,
건청궁, 향원정, 지복재 등의 공간이 야간 개장 코스로 운영되며
근대 조선의 역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건청궁은 단순한 작은 한옥이 아닙니다.
조선이 근대화를 꿈꾸고, 동시에 좌절했던 모든 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긴 역사적 장소입니다.